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(문단 편집) == 공중전에 관한 잡설 == [[파일:Ki-27_Thumbnail.jpg]] ▲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의 주력기인 [[Ki-27]]. [[랜딩 기어]]가 고정식이다.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의 전투기들이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대등한 전과를 올리고, 우세했다는 주장도 있었다. 물론 양측 모두 자신들이 우세했다고 주장했지만, 일본측은 10:1에 가까운 우세한 격추비를 보였다고 발표했고, 이를 그대로 믿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일본측이 우세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이를 근거로 일본의 전투기 수준이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보인다. [[파일:I-153_Chaika.jpg]] ▲ 할힌골 전투 중반에 투입된 소련 공군 소속의 I-153. [[I-15]]도 동체 모양이 거의 같다. I-15 문서에서 볼 수 있듯이 I-153은 I-15를 궁극으로 개량한 현대화형이다. 개전 당시 소련 전투기 전력은 전부 제70전투기연대 소속으로 구식 I-15bis가 14량, I-16이 24량이었고, 개전 직후 제22전투기연대가 배치되어 I-15bis 35량, I-16 28량이 추가로 투입되었으나, 손실이 너무나 지대했던 데다가 지상전이 소강 상태에 빠지자 소련군은 제공권을 그냥 일본군에게 내줘버리고 전력 확충에 전념하기로 결정하면서 6월 내내 와신상담하였고 특히 구식 I-15bis의 비중을 줄이면서 I-16의 수를 크게 늘렸다.[* Maslov,2010,42-44 Mikhail Maslov, Polikarpov I-15, I-16 and I-153 Aces, Osprey Publishing, 2010, pp.42-44] I-16은 당시에도 최신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기종이었지만, 독소전쟁 초반에 각인된 것처럼 아주 나쁜 전투기는 아니었다. 이는 전투기 성능보다는 2년 간 실전 경험을 쌓은 [[루프트바페]]가 독소전 발발 당시의 소련 공군을 압도하는 숙련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.[* 물론 독소전쟁 발발 시점에서 소련 공군의 숙련도가 떨어졌다면 할힌골 전투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. 독소전쟁 전투 초기에 소련 공군이 졸전한 것이 전투기 때문이건 숙련도 때문이건, 일본군에 대한 평가 측면에서는 마찬가지다.] I-16은 세계 최초로 인입식 랜딩 기어를 장착한 기종이기도 하며, [[스페인 내전]]에 투입된 결과 [[프란시스코 프랑코]] 군대 측의 CR. 32과 He-51이 상당히 고생하기도 했다. 한편 할힌골 전투 당시 일본군의 전투기는 Ki-27인데 이것은 단엽기이기는 했지만 I-16에 기술적으로 뒤진 기종이었다.[* Ki-27은 랜딩 기어가 [[Ju87]]처럼 커다랗게 돌출된 채 고정되어 있어서 접지도 못한다.] [[파일:attachment/Khalkhin_Gol_Soviet_i_16_1939.jpg]] ▲ 할힌골에 출동한 I-16. 여기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연구한 책 [[http://www.amazon.com/AIR-WARS-OVER-KHALKHIN-Nomonhan/dp/1906959234|Airwar over Khalkhin Gol]](2010, Vladimir Kotelinikov 저)에 의하면 할힌골 전투 초기에 몽골-[[시베리아]]에 배치된 소련 공군의 훈련도가 불충분했고 전투기들도 모두 구식(I-15, I-16, 그리고 7월부터 I-153)이었기 때문에 중일전쟁에서 많은 실전 경험을 쌓은 일본군 조종사에 밀렸으나, 소련군은 이후 신형 모델 I-16과 베테랑 파일럿을 계속 이곳에 투입해서 균형을 유지했고,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련 공군이 일본 [[육군 항공대]]를 압도했다고 밝히고 있다. 그러므로 초반 전과만 가지고 일본 육군 항공대가 소련 공군을 압도했다고 알려진 것은 '''사실이 아니다.''' 다만 이 성공은 소련 공군이 제56전투기연대 등 다른 전투기 전력을 연달아 배치하면서 수적으로 압도, 소모전으로 이끌어낸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고, 당시 I-15, I-16 등 소련군 주력 전투기들을 설계하면서 전투기의 왕이라고 선전되었던 폴리카르포프는 할힌골 전투에서의 막대한 피해 이후 실각했다.[* 다만 폴리카르포프도 시대에 뒤떨어진 설계자만은 아니었고, 할힌골 전투 시점에서 이미 [[Yak-1]]을 앞서는 I-180이라는 강력한 전투기를 개발중이었다. 문제는 유명 조종사 발레리 치칼로프가 허가없이 I-180 시제기를 비행하다 추락사한 것. 그 때문에 폴리카르포프는 스탈린의 신뢰를 잃었고 I-180은 물론 이후 개발 당시 소련 전투기중 최강이었던 I-185마저 취소되고 만다.] 한편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할힌골 전투 당시 23개 중대로 편제되어 있었는데 그 중 85%인 20개 중대를 투입했고 그 중 절반 가까운 손실을 입었다. 특히 후반부에 피해가 집중되었는데 초반에 일본군을 경시하던 소련이 후반기에 유럽 방면의 일류 조종사들을 데려온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. 덕택에 일본 육군 항공대는 항공기보다는 조종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제대로 된 교훈을 얻었고 그 덕에 조종사 보호 장치가 육군기에는 설치되기 시작했다. 이것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[[도조 히데키]]. 도조 때문에 많은 수의 육군 장병이 희생된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.[* 도조 히데키는 정치적으로는 굉장히 무능했지만 이와 별개로 자기 밑의 부하들에겐 한 없이 따뜻했던 덕장이었다. 물론 태평양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그 의미가 퇴색되었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